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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 이후에 나타나신 엠마오를 발견했을 가능성이 있다

기럇 여아림의 2,200년 전 헬라 시대의 거대한 요새로 성경의 미스테리,

엠마오의 진정한 위치를 알아내는데 빛을 비추다



고고학자들이 2,200년 된 헬라 시대의 요새의 거대한 벽을 발견했다.

이것은 하누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유명한 유대인 지도자인

유다 마카비를 무찌른 셀레우코스의 장군이 세웠을 것이다.

뜻밖의 사실은, 이 발견이 성경에 나오는 작은 도시인 엠마오의 위치를 밝히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곳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곳으로 나온다.


2017년부터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탐사대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몇 km 정도 거리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는 언덕이며

아부 고시 옆에 있는 기럇 여아림을 파기 시작했다.

이곳은 주로 성경에서 다윗 왕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전에

20년간 언약궤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졌다.


사실 이곳에서의 발굴은 주로 기원전 8-7세기 이스라엘의 종교적 또는

행정적 중심지가 있었을 수도 있는 벽으로 둘러쌓인 곳을 발굴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2019년 여름 발굴 기간에 학자들이 이곳에서

그 시대보다 이후에 있었던 최소한 두 시대의 증거들을 발견했다.


하나는 원래 벽의 위 또는 옆에 지어진 요새다.

이 군사 시설은 기원전 2세기 전반, 즉 헬라 시대 말기의 것이다.

텔아비브 대학 고고학자인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은

이것이 로마 시대, 즉 기원후 1세기에 보수 및 복원되었다고 말했다.


이 연대는 토기 조각과 다른

고학적 유물 및 광여기

루미네선스 연대측정법(이것으로 어떤 물질이 햇빛에 마지막으로 노출된 시대를 알 수 있다)를 기반으로 알아낸 것이다.







핑켈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예루살렘에 대한 이 장소의 중요성은 여러 시대 동안 계속해서 강조되었다.

기원전 8세기, 헬라 시대,

그리고 제1차 유대반란과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에도 그랬다.”


바다(지중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좁은 길을,

그곳을 출입하는 사람과 물건들을 통제함으로 그곳을 장악하는 사람은 그 도시를 장악할 수 있다.

그것은 고대에도 그러했고,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전쟁 시에 이 지역에서

유대인 군대와 이 길을 차단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아랍 군대의 격렬한 전투에서도 그러했다.



라틴어 비문은 기럇 여아림에 “vexillatio” - 파견대, 즉 로마 제10군단의 파견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최근에 새로 발견된 요새의 거대한 성벽은 두께가 3미터이고

일부분은 현재 높이가 2미터에 이른다. 지난 주에는 탑의 일부로 보이는 것을 발굴했다.


헬라 시대의 요새가 건설되고 200년 후에, 요새는 복구되었고 로마 군대가 그곳에 주둔했다.

이것은 그 시대의 로마 타일과 동전들 및 로마 군인의 샌들에 사용된 종류의 못이 발견됨으로 확인되었다. 이전에 고고학자들은 기럇 여아림의 언덕과 인근의 아부 고시 마을에서 네 개의 비문들을 발견했는데,

그것들은 이 도시가 제1차 유대반란(기원후 66-73년) 이후에

로마 제10군단의 파견대가 주둔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전에 헬라 시대에는 누가 이곳에 살고 있었는가?

학자들은 성서 고고학과 기독교 역사에 큰 의미를 던지는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유다 마카비의 죽음


기원전 2세기 동안 유대 지역은 헬라의 셀레우코스 왕조와

유대 마카비와 형제들이 이끄는 유대 반란과의 싸움으로 황폐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기원전 164년에 유다가 헬라인들을 물리치고

예루살렘과 성전을 탈환한 것을 기억한다.

이것이 하누카 절기에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세한 이야기를 보면, 그 전쟁은 그 이후에 오래 지속되었고,

유대인들이 유다의 후속자들, 하스모니안 왕조 아래에서

실제적인 독립을 얻기까지 수십년에 걸쳐서 물리적 충돌과 정치적인 일들이 있었다.


유다는 기원전 160년에 반란을 제압하기 위하여

유대에 파견된 장군인 바키데스가 이끄는 셀레우코스 군대와의 엘라사의 전투에서 패하여 죽었다.

바키데스는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마카비1서와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수도(예루살렘)로 접근하는 것을 지키기 위하여 원형 요새를 건설했다.

바키데스는 또한 아크라, 즉 그 도시에 있는 셀레우코스의 요새를 보강하였는데,

이 유적은 2015년에 발견되었다.


핑켈슈타인과 함께 이 연구에 대하여 공동으로 저술한

프랑스 대학의 성서학 교수인 토마스 로메르는 바키데스의 건설은

이 시기에 유대 지역에서 대규모 요새 건설로는

유일하게 알려진 경우라고 했다.

그렇다면 기럇 여아림에서 발견된 헬라 시대의 성벽이 바키데스가 지은

요새의 성벽들 중 하나일 수 있는가?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와 마카비1서 9장은 이 장군이 요새화시킨 도시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벧엘, 여리고, 게셀, 벳호론 및 다른 곳들이 있다.

장소들은 대부분 예루살렘의 북쪽, 남쪽, 동쪽으로 확인되며,

그 가운데 일부에서 고고학자들이 헬라 시대 요새의 유적들 실제로 발견했다.


이 목록에 기럇 여아림은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이 이름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목록에는

그 위치가 밝혀지지 않은 한 장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곳은 예루살렘 서쪽의 어딘가이며

이 도시와 욥바와 지중해변을 잇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로 상에 있다.

이 장소는 요세푸스와 마카비1서에 의하면 엠마오로 알려졌다.


예루살렘 서쪽에서 중요한 헬라 시대 요새가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에,

핑켈슈타인과 로메르는 기럇 여아림의 언덕,

아부 고시 근처의 마을이 바키데스가 요새화한 엠마오일 것이라고 했다.






기럇 여아림의 2,200년 전의 헬라 시대 요새


물론 이 마을의 이름은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두 제자에게 처음 나타나신 곳이 엠마오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4:13-35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서 두 제자는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엠마오에 도착하고 예수님과 함께 빵을 나누자

“그들의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적이 일어난 곳을 정확히 짚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곳은 바키데스가 몇 백 년 전에 요새화한 같은 도시가 맞는가?


누가는 엠마오가 예루살렘에서 60 스타디아 거리에 있다고 했는데,

이 거리는 약 11km로 기럇 여아림 언덕과 아부 고시에 이르는 거리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가와 다른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 장소가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처음으로

기적적으로 나타나신 장소로 믿었던 장소인가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핑켈슈타인과 로메르는 이곳이 고고학적으로, 지리적으로, 지형적으로 충분한 논거가 있지만,

그럼에도 가설은 가설일 뿐이다"고 했다.


고고학자들이 기럇 여아림의 거대한 요새를 발굴하고 있다.


한 곳, 두 곳, 세 곳의 엠마오?


엠마오는 히브리어로 함마, 온천을 헬라어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이름을 갖고 있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


전통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의 시대의 엠마오를

후대의 비잔틴 시대의 도시인 엠마오 니코폴리스로 보았다.

이곳은 오늘날 라트룬 교차로 근처에 있는 아얄론 골짜기에 위치한다.


2-3세기 기독교 역사가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엠마오 니코폴리스를 누가복음의 엠마오로 보았다.

기럇 여아림/아부 고시와 다르게, 엠마오라는 이름의 흔적은

팔레스타인의 한 마을에 임와스(Imwas)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이 마을은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대에 의하여 파괴되었고

그 유적은 국립공원의 일부로 남아 있다.


엠마오 니코폴리스는 마카비1서 4장에 엠마오에서의 전투에 묘사된 것과 들어맞는다.

거기서 유다 마카비는 바키데스를 만나기 몇 년 전에 셀레우코스 군대를 물리쳤다.


그러나 엠마오 니코폴리스는 예루살렘에서 25km 거리에 있는데,

이것은 누가복음에 나온 거리의 2배 이상 되는 거리이다.

그러므로 완벽하게 들어맞는 곳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이 생각하는 두 번째 후보지는

오늘날의 모짜(Motza)로 예루살렘과 기럇 여아림 사이에 있다.

이곳으로 본 이유는,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에서 엠마오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그의 군대 중에서 베테랑 800명을 주둔시키고 식민지(거주지?, 라틴어로 콜로니아)를

세우게 한 기록 때문이다.


이 사건이 칼루냐(Qalunya)라는 이름에 반영되었는데,

이곳은 모짜 옆의 아랍 마을로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때 파괴되었다.


반면 칼루냐/모짜 지역은 누가복음에 나온 것보다 예루살렘과의 거리가 너무 짧다.


기럇 여아림과 아부 고시를 엠마오와 연결시키는 고대의 또 다른 전승이 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최소한 일부 기독교인들은 유세비우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이 엠마오 니코폴리스가 아니라

기럇 여아림/아부 고시에서 일어났다고 믿었다.

이런 이유로 12세기에 십자군들은 아부 고시에 화려한 프레스코 장식을 한

부활 교회(Church of the Resurrection)를 세운 것이다.


로메르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는 지리적으로 예루살렘과의 거리가 잘 들어맞기 때문에,

기럇 여아림이 신약 성경의 엠마오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연구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이 정말로 그곳에서 일어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성서고고학은 전 세계에서 수백만명이 성스럽게 생각하는

종교 문서의 역사적 배경과 그것이 기술하는 장소들이 얼마나 정확한지에 대한 통찰력을 줄 수 있다.


출처: 하아레쯔 2019년 9월 3일 기사

https://www.haaretz.com/israel-news/.premium.MAGAZINE-israeli-archaeologists-may-have-found-emmaus-where-jesus-appeared-after-crucifixion-1.777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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